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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정두언 참회록20] 세종시 수정안은 왜 실패했는가

MB는 차기에 박근혜가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봐서 정운찬을 키워보겠다고 한 듯했다

2016.12.02(Fri) 14:48:28

# 세종시 수정안과 정운찬의 등장

 

MB(이명박 대통령)는 ‘행정수도 세종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과학비즈니스벨트로 대체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과학비즈니스벨트는 애초에 서울대 민동필 교수가 제안했다. 민동필을 MB에게 소개한 사람은 박영준이었다. MB는 경선 기간 중 아베를 만나러 일본에 간 김에 과학비즈니스벨트와 성격이 비슷한 도시인 ‘스쿠바’를 둘러보기도 했다. MB의 생각은 옳았지만, 충청 민심은 그 진심을 몰라주었다. 과학비지니스벨트로 ‘세종시는 됐다’라고 생각할 줄 알았는데, 과학비지니스밸트와는 별개로 세종시는 세종시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흘러갔다. 

 

MB는 할 수 없이 정부 부처 대신 기업이 가는 것으로 세종시 수정안을 구상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도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잘못된 고정 관념이나 편견을 갖고 있다. 관공서가 가면 그 지역이 발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전남도청이 전남 무안으로 간다고 무안이 발전했는가? 지금은 기업이 가야 도시가 발전한다. 과거 도청소재지였던 곳이 큰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 주도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관의 역할은 작아지고 민, 특히 기업의 역할이 커졌다. 기업 위주로 발전하는 것이다. 울산, 광양, 포항은 기업 때문에 불경기가 없는 도시가 됐다. 

 

그런 이유로 세종시도 실속 있게 기업을 넣자고 했는데, 결국 대국민, 특히 충청도민을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 박근혜가 반대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박근혜가 결국 세종시를 원안대로 밀어붙인 것은 충청표를 붙잡고 가겠다는 정치적인 계산 때문이다. MB는 그것을 돌파하기 위한 수순으로 충청 출신 정운찬을 총리로 등장시킨다. 내가 알기로 정운찬은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는 것을 전제로 총리로 들어왔다. 

 

MB는 차기에 박근혜가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보고, 박근혜를 견제하기 위해 정운찬을 발탁한 것 같다. 사진=청와대 제공


MB는 박근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는 MB에게 들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안다. MB는 차기에 박근혜가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고 봤다. 그는 박근혜를 견제하기 위해 대타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정운찬도 그런 의미에서 키워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나중에 김태호도 그런 면에서 총리 후보로 밀었다. 하지만 그것처럼 어리석은 생각도 없다. 후계자를 본인이 키우겠다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불가능한 얘기이다. 국민들은 그렇게 키워진 후계자를 차기 지도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국민은 스스로 큰 사람을 지도자로 뽑지, 키워준 사람을 지도자로 뽑지 않는다. 차기에 지도자가 될 뜻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현 대통령이 키워준다고 하면 도망가는 게 맞다. 정운찬, 김태호도 그런 면에서 보면 정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내 기준으로 볼 때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 정운찬에 대한 실망

 

MB는 세종시도 돌파하고 차기 주자도 키워보겠다는 뜻으로 정운찬을 등장시킨 것 같다. 정운찬이 총리가 되고 나서 곽승준이 “​형, 우리가 정운찬을 도와줍시다”​ 해서 정운찬을 두세 차례 만났다. 나, 김원용 교수, 김용태, 정태근, 곽승준이 정운찬을 만나서 얘기를 나눴는데 너무 실망스러웠다. 세간에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에게는 비전도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총리의 1급 참모들은 본인이 데려다 써야 하는데 그에게는 사람이 없었다. 고작 공보실장을 김창영(전 자민련 대변인)이 했다. 정운찬이 정무실장으로 누구를 데려다 쓰겠다고 말하는데 급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결국 여러 사람이 오르내리다가 인수위에서 일했던 국정원 출신 김유환이 적임자로 판단되어 정운찬과 김유환이 만났다. 사실 인품이나 능력, 식견에서 그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김유환을 쓰겠다고 하니 당연히 이상득 쪽에서 견제가 들어왔다. 그래서 결국 질질 끌다가 넉 달 만에 김유환을 임명한다. 그것을 앞장서서 방해한 게 박영준이다. 정운찬은 박영준이 국무차장(차관급)으로 자신의 밑에 있었는데도 어떻게 하지를 못하고 우리를 만나면 박영준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총리가 부하 직원인 국무차장에 대해 불만을 토하는 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가. 그래서 “그러면 자르세요!” 했다. 반대로 박영준은 기자들에게 총리를 대놓고 비난했다. 자르라고 얘기한 내 꼴만 우스워졌다. 그래도 곽승준이 도와주자고 해서 그만둘 때까지 도우려고 애를 썼다.

 

나중에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된 뒤 MB는 정운찬을 갈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운찬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MB가 자기를 신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때문에 언론에서 혼선을 빚곤 했다. 그때 정운찬이 우리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름 조언을 해주었으나 알겠다고만 하고 결국 실천을 못했다. 자기 브랜드로 정국을 주도하라는 의미에서 감세 철회 등 여러 가지를 제안했지만 그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이동관이 기자실에 가서 총리 교체를 언급했다. 그 얘기를 들은 정운찬이 씩씩거렸다. 그러면서 지난 주말에 MB가 총리 공관에 와서 부부끼리 밥까지 먹었는데 이동관이 뭘 모르고 저런다는 것이었다. 

 

정운찬 총리는 세간에 개혁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사진=비즈한국DB


그런데 생각해보라. 어떻게 이동관이 자기 마음대로 기자실에 가서 총리가 교체될 것이라고 얘기를 하겠는가. MB 뜻이 그러니까 이동관이 가서 그렇게 얘기한 것이다. MB가 총리공관에 가서 밥을 먹은 것은 나름 예우를 해주며 굿바이 사인을 준 것이다. 정운찬은 그것을 거꾸로 해석했다. 너무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까. 당시 서울대 제자들도 정운찬을 찾아가 더 망가지기 전에 총리 그만두라고 얘기했다고 들었다. 

 

세종시법이 국회에서 부결된 뒤 정운찬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리를 던지던지, 아니면 대대적인 국정 쇄신을 주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본인은 내심 자리를 연장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와 정태근이 정운찬을 찾아가서 “소신껏 국정 쇄신책을 얘기해라. 국정쇄신에 대해 MB가 받아들이면 당신을 신임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사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정운찬은 “내가 어떻게 MB한테 그렇게 하느냐”며 난색을 표했다. 

 

언론에서는 내가 정운찬과 오래전부터 친하다고 했는데, 나는 정운찬을 총리 공관에서 난생 처음 봤다. 더욱이 총리에 정운찬을 추천하지도 않았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았지만. 정태근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은 정태근의 증언이다. 

 

“정운찬은 MB 정부에서 역할을 하고 싶어서 진작부터 이상득이나 박영준 그룹과 계속 만나 왔다. 우리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내가 처음 곽승준한테 들은 얘기는, MB가 자기를 불러다가 정운찬을 총리 시킬 테니까 너희들이 인물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박근혜를 제치는 차기 대안으로 정운찬을 얘기한 것이었다. 나는 MB 정권의 쇄신과 박근혜 대항마라는 관점에서 정운찬도 괜찮은 카드라고 생각했다.

 

소위 쇄신파라고 불리던 여권 인사 가운데 정운찬과 그나마 가까운 사람은 김성식이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김성식은 역할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장 수행할 사람도 없어서 내가 사업하고 있는 사람을 휴직시켜 정운찬에게 붙여줬을 정도였다. 나는 정운찬을 통해 주도권은 아니라도 국정 흐름에 있어서 새로운 판을 만들어 보자는,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운찬은 독특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현실 정치권 진입이나 리더의 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은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스타일은 MB에게는 총리로서 충언, 직언을 못하고, 그럼에도 소장파 쇄신 그룹은 잡아놔야겠고, 그 전에 관계가 있던 이상득, 박영준과도 싸우기 싫은 형태로 나타났다. 정치적인 욕심은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달성하고 실현하겠다는 전략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돌이켜 보면 정운찬에 대한 이해도 적었지만, 나도 별 구체적인 준비도 복안도 없이 그저 정운찬을 활용해 MB의 국정운영을 개혁적인 방향으로 틀어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세종시 수정안을 가지고 우리가 주도해 국면을 바꿔보자는 막연한 욕심도 있었다.”

 

 

# 세종시 수정안이 실패한 이유

 

세종시 원안을 바꾸기 위해서는 당 소속 국회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세종시 수정안이 당론으로 통과된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봐도 그게 불가능했다. 청와대 박형준 홍보수석에게 계산이 안 나오는데 복안이 있냐고 했더니 마치 복안이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런데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됐다. 이것을 관철하려면 박근혜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 이렇게 밀어붙이다가는 MB만 망신당할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마치 무슨 복안이 있는 것처럼 밀어붙였다. 정확히 어떤 계산이었는지 지금도 미스터리다. 사실 수정안을 어떻게 관철할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당시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당론 변경을 위해 우선 정태근이 대정부질의를 했다. 당초 행정수도로의 결정도 잘못됐고, 한나라당 내에서 의사 결정을 한 과정도 잘못됐다며, 그 내용을 상세하게 정리했다. 그것을 친박들이 박근혜에게 사전에 보고했던 것 같다. 박근혜는 정태근을 본회의장 복도에서 따로 불러서 “정 의원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고 나름대로 해명했다. 정태근은 “아니다. 내가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당론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정해 달라”고 반박했다. 정태근이 꼬박꼬박 반박을 하니까 박근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태근이 대정부질의를 마칠 때까지 앉아 있던 박근혜는 질의가 끝나자마자 나가 버렸다. 2011년 11월6일 연합뉴스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박근혜, 정태근 '세종시합의 책임론' 반박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2005년 세종시건설 여야 합의 과정을 비판한 친이(친 이명박)계 정태근 의원을 만나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정 의원의 지적을 반박한 것으로 6일 알려졌다. 정 의원은 전날 국회 정치 분야 대정부질문을 통해 "세종시 여야 합의 당시 박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원칙을 저버리고 열린우리당과 협상해 ‘12부4처2청'이라는 여야 합의를 이루고 의원총회를 개최했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원칙을 저버린 여야 합의, 재적 과반수도 안 되는 찬성표결에 의한 당론 결정에 대해 세종시 수정을 논하는 것은 너무도 정당한 국회의원의 권리이자 당의 존립과 상관없는 건강한 문제제기"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대정부질문에 앞서 본회의장에서 정 의원을 만나 2005년 당시 여야 합의과정의 자초지종과 당내 상황을 소상히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원칙 없는 세종시 합의 문제를 지적할 것이라는 내용을 전해 듣고, 정 의원의 문제제기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사전에 반박한 셈이다.

 

이 자리에서 박 전 대표는 2005년 당시 여야 합의안을 놓고 당내 충분한 토론이 이뤄졌고, 합의안을 반대한 사람의 요구로 표결에 부쳐 합의안이 채택됐다는 점을 설명하고 `당론 결정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취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정 의원도 "당시 여당의 세종시 건설법안을 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면 당론으로 반대하는 게 옳았고, 원칙적으로 위법성이 있는 법안에 대해 합의안을 만든 것 자체가 문제"라고 재차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1월 3일 세종시 건설을 두고 정운찬 총리와 박근혜 전 대표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국회본회의에 참석한 박근혜 전 대표가 의원들과 대화도중 손을 뻗어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비즈한국DB


김무성이 원내대표가 되면서 나나 정태근 등은 차제에 친이, 친박 문제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사건건 당내에서 서로 대립해서는 당이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봤다. 김무성이 박근혜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이참에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시킬 수 있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래서 세종시 문제를 계속 밀어붙인 것이다. 그러면서 안 될 경우의 대안은 고민하지 않았다. 당내 반대 세력이 있는 사안이라 획기적인 방안과 치밀한 전략이 있어야 했지만 그냥 들이받는 그런 형태였다.

 

김무성은 세종시 수정안에 찬성했다. 아마 이재오 하고 김무성과는 사전에 얘기가 있었던 것 같다. 이재오는 김무성을 끌어들이면 친박을 와해시킬 수 있고 3분의 2를 돌파할 수 있다고 MB를 설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계산이 안 나오는 일을 터무니없이 시작했을까. 그래서 그때 김무성이 나서지 않았나 싶다. 김무성으로서는 정치적으로 MB의 지원을 받아 박근혜의 대안으로 서고자 하는 베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김무성을 따른 친박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또 이런 측면도 볼 필요가 있다. 세종시만큼 MB 정부가 집권 중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엄밀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없다. 왜냐? MB 정부는 세종시 문제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잡았다.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인 법은 ‘행정중심복합도시법’과 ‘공공기관 이전에 관한 혁신도시법’이다. 이게 2007년 초에 통과가 된다. 이 법이 통과된 후 MB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공공기관 이전지가 결정이 난 곳이 있는 반면 결정이 안 나 의원들끼리 우리 동네로 와야 한다면서 서로 싸움박질도 벌어지고 그랬다. 사실 그 당시 세종시를 수정할 생각이 있었다면 혁신도시 사업을 중단시켰어야 했다. 공공기관이라도 대거 그곳으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이다. MB 정부는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집착 말고는 실제로 국정을 하면서 이 정도 중요한 사안을 언제, 어떻게 다루어 갈지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것 같다.

 

세종시 수정안이 박근혜라는 벽에 부딪혀서 못나가고 있을 때 그것을 뚫으려고 뛰어든 사람이 나와 정태근, 김용태 이외엔 없었다. 소위 ‘친이 충성파’라는 의원들도 박근혜의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오죽하면 MB 정권에 비판적이던 우리가 나섰겠는가. MB는 당내에 다수파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정작 싸움이 필요할 때는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 엉터리 권력놀음으로 탄생한 세종시

 

세종시 문제로 MB 정권은 완전히 결딴이 났다. 수정안이 부결되면서 권력이 사실상 박근혜에게 넘어간 것이다. 정치적으로 의미가 굉장히 컸다. 박근혜가 완승을 한 것이다. 사실 박근혜는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MB를 꺾은 뒤 권력을 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박근혜는 처음에 아무런 입장표명을 안하다가 갑자기 세게 치고 나왔다. 박근혜도 ‘MB가 무슨 대안이 있기 때문에 저럴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숨을 죽이고 한 달 가까이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김무성이 수정안에 찬성하고 나왔다. 거기에 별 호응이 없자, 박근혜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박근혜가 치고 나오면서 야당도 붙고, 수정안에 우호적이던 여론도 확 바뀌었다. 박근혜가 그런 면에서는 위기관리를 잘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잠시 2005년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2005년 4월 13일 대정부 질문에서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당시 이해찬 총리와 문답을 한 적이 있다. “위헌 결정이 났기 때문에 못했다”는 이 총리에게 나는 “꼭 필요한 사항이라면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다음은 당시 문답 내용이다. 

 

정두언 : 왜 한 것이지요, 수도 이전을?

이해찬 : 여러 차례 말씀을 제가 이 자리에서 드렸는데 제가 2000년도에 교육부 장관을 그만두고 정책위의장을 할 적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수도권 과밀을 해소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을 준비를 해 봐라” 하고 저한테 과제를 주셨어요. 그래 가지고 새천년민주당 시절인데 새천년민주당에다가 과밀 해소 태스크포스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서 한 6개월을 전문가들을 모시고 토론을 해보니까 ‘수도권에 다른 어떤 방법도 과밀 해소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수준 정도의 계획이 아니면 과밀 해소가 어려울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서 그것을 대통령께 그때 제가 보고를 못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2001년도로 넘어가니까 집권 말기로 들어가는데 도저히 그것은 할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서 연구를 종결을 시키고 일단 보류를 해 두었다가 2002년 대통령선거 때 정책으로 공약화를 시킨 것입니다.

정두언 : 그러니까 수도 이전은 수도권 과밀 해소하고 국토 균형 발전을 위해서 하신 것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이해찬 : 예.

정두언 : 그러니까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지요?

이해찬 : 예.

정두언 :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권의 명운을 걸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것을 포기하셨습니까?

이해찬 : 위헌 결정이 나서 못 하지 않습니까?

정두언 : 글쎄요, 위헌 결정은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헌법사항이기 때문에 헌법 개정 절차를 밟아서 하라 이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백년대계를 위해서 꼭 해야 될 일이면 헌법 개정 절차를 밟아서, 다시 말해서 국민의 뜻을 물어서 했어야 될 일이지요.

이해찬 : 지금 헌법 개정을 그것을 가지고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정두언 : 그러니까 헌법재판소의 뜻은 ‘헌법 개정 절차를 밟아라, 다시 말해서 국민투표를 부쳐라, 국민의 의사를 물어라’ 그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 꼭 해야 될 일이면 개정 절차를 밟아서 하면 되지요. 헌법재판소가 하지 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 했습니다. 포기했습니다.

이해찬 : 지금 어떻게 헌법을 개정하겠습니까?

정두언 : 그러니까 얘기는 국민의 다수가 반대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없으니까 포기해 버린 것이지요.

이해찬 : 아니, 헌법을 개정하려면 다른 것보다도 우선 국회에서 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받아야 되는데 전체 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어떻게 받겠습니까?

정두언 :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서 꼭 해야 될 일이라면 그렇게 노력을 하셨어야지요.

 

수도이전 위헌 판결 후 노무현 정부는 수도이전의 편법으로 행복도시를 대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오히려 박근혜의 한나라당이 행복도시법을 주도했다. 이 와중에 박세일 정책위의장이 의원직을 사퇴했다. 나도 행복도시 특위에 들어가서 계속 반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때 특위에서 만든 1, 2, 3안이 뭐냐면, 만약에 이전 대상 부처 기관이 ①20곳이라면 다 가야 한다, ②15곳 가야 한다, ③10곳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코미디 같은 대안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내가 대정부질문에서 다시 얘기를 했다. 

 

“어느 학교에 빵을 주는데 20개 줄까요, 15개 줄까요, 10개 줄까요 그러면 당연히 다 달라고 하지 않겠느냐. 그게 무슨 대안이냐. 대안이라면 이래야 대안이다. 행복도시가 50만 자족도시를 목표로 하는 것 아니냐. 20개 정부기관이 전부 가는 것 1안, 15개 정부 기관이 갔을 때, 그 대신 여기에 기업 등 무엇을 몇 개 넣겠다가 2안, 10곳이 간다면 그 대신 기업 등을 몇 개 넣겠다가 3안, 이런 것이 대안 아닌가?” 국민의 대표기관이라는 국회에서 하는 일이 이렇게 엉터리인 것이 한둘이 아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세종시 수정안이 딱 맞는다. 50만 명이 사는 자족도시를 위해서는 이러이러한 기업이 들어가야 한다는 MB가 제시한 방안이 옳았다는 말이다. 

 

2009년 9월 22일 국회 본청앞 계단에서 자유선진당 의원들과 충청지역 주민들이 세종시 원안사수 1천만 명 서명운동 출범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비즈한국DB


세종시는 헌법개정 절차를 밟아서 제대로 하든지, 포기하든지 했어야 하는데,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적당히 타협한 변종으로 바뀌었다. 당 대표였던 박근혜가 노무현 정부와 타협해서 기형적인 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MB는 세종시 수정안이 실패하자, 과학비즈니스벨트도 안 보낸다고 나왔다. 국정 운영을 감정적으로 한 것이다. 수정안이 안 됐으면 과학비즈니스벨트라도 붙여서 제대로 된 도시를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 국가 지도자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는가. 

 

MB는 대선 과정에서 과학비즈니스벨트를 대전 근방으로 하겠다고 공약했다가 수정안이 무산되자 다른 곳으로 할 것처럼 했다. 나는 약속을 지켜 대전 부근에 과학비즈니스벨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과학비즈니스벨트는 대전뿐 아니라 광주로도 가고 포항으로도 가고 한마디로 누더기가 됐다. 계획만 세워놓고 예산도 잘 안 내려가고 진행이 안 되고 있다. 거의 실종되어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충청도 사람 빼놓고는 관심도 없다. 국가 정책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정두언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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