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불황엔 간판집만 돈 번다’는 속설이 있다. 경기침체로 자영업자의 개·폐업이 줄을 잇다 보니 늘어나는 건 새 간판 주문밖에 없다는 씁쓸한 얘기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도 간판업만은 호황을 누렸다. 2009년 한국전화번호부가 설문조사와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선정한 ‘불황에 뜨는 이색 자영업 10가지’에도 간판업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옛날 얘기가 됐다. 간판업자들은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 을지로 간판 골목 “20년 만에 처음으로 적자 났다”
‘간판골목’이라 불리는 을지로 뒷골목에는 간판 제조업체 30여 개가 모여 있다. 한창 바빠야 할 평일 오후에도 골목은 조용하다. 직원들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인터넷 검색으로 시간을 보낼 뿐이다. 업무를 하느라 분주하거나 간판을 제작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간판업자 A 씨는 “요즘 간판업도 상황이 안 좋다. 경기가 좋아야 간판도 제작할 텐데 워낙 불경기다 보니 가게를 오픈해도 간판을 새로 달지 않는다”고 한숨지었다. 예전에는 가게를 열면 번듯한 간판을 다는 것부터 시작했지만 요즘에는 기존 간판을 천갈이를 하거나 최소한의 수정 작업만 할 뿐, 새 간판 주문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설명이다. A 씨는 “기존 간판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은 금액이 얼마 되지 않는다. 요즘은 일이 없으니 그런 작업마저도 경쟁이 치열해져 잡기가 힘들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을지로에서 22년간 간판집을 운영한 B 씨도 힘든 상황은 마찬가지다. 그는 “간판 문의가 올해 평년보다 50% 이상 줄었다. 올 2월, 간판업을 시작하고 처음 적자가 났다”며 “작년 겨울부터 급격히 상황이 안 좋아졌다. 특히 프랜차이즈 업종과 요식업 등의 주문이 크게 줄었다”고 전했다.
‘불황엔 간판업만 호황’이라는 말에도 고개를 저었다. B 씨는 “IMF (구제금융) 때 간판업이 돈을 벌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때는 명예퇴직 등으로 회사를 나온 사람들이 자영업으로 몰리다 보니 간판을 새로 다는 일이 많았다”며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최저임금, 52시간 근무제 등으로 소비가 많이 줄다 보니 사람들이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에 보수적 태도를 가진 듯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간판업계 관계자는 “간판을 달지 않는 트렌드도 매출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 을지로만 해도 새로 문을 연 카페, 음식점이 굉장히 많지만 대부분이 간판이 없는 가게”라며 “폐업한 자리에 다른 가게가 들어서도 최소한의 자본으로 창업을 하니 간판이나 인테리어 등에 드는 비용을 줄이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 자영업 시장의 위기, 소자본 창업이 큰 문제로 지적
다른 업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20년간 간판업을 해온 C 씨는 “요즘 계속 적자다. ‘문 닫아야 할 때가 왔다’는 얘기를 사람들끼리 심심찮게 한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구조인데 임대료는 오르고 장사는 안 되니 답답하다”며 “을지로에 있는 간판집은 20~30년간 한 자리에서 일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최근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옆 가게는 지난 3월 일하던 직원들을 정리했다. 근방에만 문 닫고 비어 있는 가게가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푸념했다.
신규 간판 신고 현황은 줄어드는 추세다. 통계청이 공개한 신규 및 연장 옥외광고물 허가·신고 현황을 보면 간판 신고 수는 2016년 25만 3888개에서 2017년 7만 288개로 70% 이상 감소했다.
간판업 불황은 녹록지 않은 자영업 시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중소기업연구원에서 발표한 ‘자영업 서비스 R&D 활성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자영업 폐업률은 87.9%로 전년 대비 10.2% 증가했고, 음식점 폐업률은 92%로 심각한 수준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재 자영업 시장이 굉장히 위험한 상태다. 국내 자영업자는 570만 명 규모로 이들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도 무너진다”며 “특히 소자본으로 시작하는 자영업자가 많다는 게 큰 문제다. 경기가 침체된 상황에서 소자본으로 창업한 사람들은 한 달을 버틸 여유도 없다. 부채만 늘다가 결국 폐업하고, 그 자리에 40~50대 퇴직자들이 다시 소자본으로 창업하는 같은 수순을 밟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 교수는 “정부에서 좋은 의도로 최저임금제를 도입했지만 근무시간이 줄고 일자리를 잃는 등의 부작용으로 소득이 감소해 소비시장이 침체되는 효과가 나타났다”며 “소상공인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형 자영업 형태를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 정부는 금융 지원과 정책적 지원, 경영 노하우 전수 등의 방안을 마련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해나 기자
phn0905@bizhankook.com[핫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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